본문 바로가기

letter

어머니의 손과 냄새와 환한 웃음이 그립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으셨다. 그저 갱년기 우울증을 심하게 겪는 정도인 줄 알았던 가족들은 어머니의 병명을 듣고는 놀랐다. 아마 가장 놀란 사람은 어머니 본인이었을 것이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고 했다.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죄책감이 함께 왔다.

이별의 순간은 내 예상보다 너무 일렀다. 자식으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리움 같은 애틋한 감정보다는 슬프고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든다.

어머니의 마지막은 어머니가 평생 아끼고 돌봤던 가족들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어머니의 마지막이 쓸쓸하고 외롭지는 않았다.' 그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

세상 모든 할머니들이 그렇듯 어머니도 손녀 손자를 몹시 사랑하셨다. 병상에 계실 때도 손녀 손자들의 영상을 즐겨 보시며 저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고 그게 유일한 욕심이라고 하셨다. 가끔 아이들과 유치하게 다투고 있자면 어머니의 그 말씀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전투력 0이 되어서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줄 수밖에 없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첫째 아이에게 나의 어머니는 '대구 할머니' 또는 '아이스크림 할머니'로 기억되어 있다. 자신이 감기에 걸렸는데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떼를 쓰니 엄마 아빠 몰래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먹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아빠, 나 대구 할머니 보고싶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하다.

어머니는 따뜻한 커피와 감성적인 멜로디의 올드팝을 좋아하셨다. 의외로 강렬한 비트의 힙합도 좋아하셨다. 영화관 나들이도 좋아하셨다. 수성못 근처를 가족들과 함께 걸으실 때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며 좋아하셨다.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걸 잔뜩 해드리고 싶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진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범물동 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범물동은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 무렵까지 살던 동네이다. 어머니는 예전 기억과는 너무도 달라진 동네 모습에 놀라셨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지형과 풍경을 읽어 내셨고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남는다. 나는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부터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온라인 공간에 모아뒀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지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서서히 잊혀질 것 같았다. 두려웠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삶이 돌아가시기 직전 몇 년 간의 투병생활로만 기억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누가 어머니에 관해 물어보면 지금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다. 경북 성주 출신의 어머니와 전남 나주 출신의 아버지가 어쩌다가 대구 근교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누나와 나를 낳으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우여곡절'이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숙명'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을 '아름다운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함께 한 내 인생의 몇 토막은 실로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내가 무얼 한다고 해도 믿고 지지하고 응원해 주셨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그 무한한 지지와 응원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생명을 주셨고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함께 주셨다. 아마 내가 평생을 곱씹게 될 그것은 참으로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손과 냄새와 환한 웃음이 그립다.

 

 

* 이 글은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코너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2081715391003800